히브리서가 던지고 있는 본질적인 질문

[히브리서가 던지고 있는 본질적인 질문]

  1. 우리 지금 왜 이땅에 고난받으며 살고 있는가.
  2. 믿음의 재정의: 믿음이란 진짜 무엇인가.
  3. 관계의 재정의: 믿음의 의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믿음은 어떤 매개적 수단의 방법이 아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이다. 믿음은 단순히 기대와 소원의 답을 주거나, 세상의 물질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소원하고 기대하는 것이 세상은 유물론적 기원을 가졌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문전에 도착하게 되고 믿고 나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이 의미했던 믿음에서 인간이 소원하고 기대하고 생각하고 의심하는 어떤 기능적 차원에서 이 단어가 성립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서 “믿음으로”를 “믿음이”로 생각해야 한다. 믿음이 아벨의 제사를 받게 했고, 믿음이 죽지 않게 했고, 믿음이 미래를 가지게 했다. 본인이 모르는 것과 보지 못한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보고 아는 자가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다. 아벨의 제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낫다가 아니라 인간들이 뚜렷한 대상에 대하여가 아닌, 잘먹고 잘살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에 불가한 종교행위에 잡혀 있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것을 받으심으로 가인과 단순히 구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반응하셨다는 것이다. 아벨이 그 첫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에녹이나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미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하나님의 자세가 하나님의 행동의 근거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지 알아야 된다라는 필수 전제가 성립된다. 믿음은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뜻을 갖고 있다.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큰 근거로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너와 나의 관계는 다르다를 근거하여 믿음을 행사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벨도, 에녹도, 노아도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하는 것 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처럼, 사랑하는 주인으로서 우리를 대접해 주신다는 것이다. 아담이 실패하여 사망을 만들어 낸 그 자손들 인류에 대하여 하나님은 잘했다 못했다로 나누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을 가졌던 그 뜻을 이루고야 만다라는 그 의지가 창세기에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신다는 것에서 믿음의 등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앙 행위가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피워야 하는 꽃임을 나타낸다. 믿음이 조건이 되어 보상을 받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지 않으며, 처절하게 정성을 바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문제와 가장 크게 결부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실패했을 때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과 우리가 잘못했다고 영벌로 결론을 내리시지 않는 데서 드러난다.

결국 어떤 문제가 남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와 믿음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 목적을 포기하시지 않는 분이며,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고 있다면 신앙생활이 왜 어려울까?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순전한 순종을 약속하는 때에도 왜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살게 하시는가 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던지는 질문의 본질이다. 예수님 잘 믿는데 왜 이렇게 신앙생활이 어려운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다.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이 되었던 애굽에서 나와 자유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했고 그도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죄사함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근거로 한 모든 것을 주신것이다. 믿음을 근거로 했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자신의 관계를 어떤 보상, 조건, 자격, 노력, 원인과 결과의 방법론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녀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로 이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얼마나 잘했냐, 못했냐의 양적인 차원을 넘어 질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있음을 이해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착하게 살았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의 식이거나, 윤리와 도덕에 의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는 식의 사고를 여전히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의 본질은 사랑이다. 믿어라는 조건으로 성경에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이 제발 나를 알아라! 내가 너희에게 누구인지를 알아라! 밤낮 주시옵소서좀 그만해라! 이게 기독교인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는 우상이다. 우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신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의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뭘 만들고 당신과 어떠한 관계를 만들고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기껏 그들의 노력의 보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고아가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믿으면 지옥가고가 아닙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도가 근거에서 도덕이 아니고, 잘잘못 따지는게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자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너희를 위해 내 목숨까지 내놓을수 있다는 아버지된 사랑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그가 사랑과 믿음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신다. 그가 사랑과 믿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어 예수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나타내려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답다를 이루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답다를 예수를 통하여 증명하시며,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다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에게 많은것을 허락하고자 하신다. 믿음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배워야 한다. 세상에는 믿음이 없다. 사랑이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굶주림이 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이 뺏어간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넉넉한 자로 설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원하는 의와 평화와 기쁨은 아무 문제가 일어나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사랑과 믿음에서 성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인 것을 아는 것으로 세상을 이기는 인생 되어야 한다. 아멘.

*위 묵상은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의 히브리서 강해 설교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