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자신을 개혁하라 (Re-Grace 종교개혁세미나)
[Re-Grace 종교개혁세미나 정리] “날마다 자신을 개혁하라” 주종훈 교수
오늘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경외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분별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찾아와 분명히 요구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따르는 일이다. 바울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라”고 말한다. 분별의 대상은 단순히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한 것(the best)”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다.
분별을 위해 점검할 세 가지가 있다. 사랑, 지식, 총명이다. 이 셋은 균형 있게 자라나야 한다. 사랑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그 사랑이 타인에게 짐이 된다. 지식만 많고 사랑이 없으면 판단만 남는다. 두 가지를 잇는 다리가 총명이다. 총명은 애매한 추상이 아니라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실천적 분별력이다.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야 주변을 살릴 수 있다.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 지식이 성숙하는가, 총명이 깊어지는가를 삶 속에서 늘 점검해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바울은 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라고 권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우리의 언어와 삶의 방식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옷을 샀는데 몸에 맞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 옷을 수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옷은 바꿀 수 없다. 바꿔야 하는 쪽은 우리다. 그리스도의 옷에 우리를 맞춰 가는 훈련이 바로 개혁이다. 어색함을 견디며 몸(삶)을 바꾸어 옷에 맞춰 가야 한다.
종교개혁의 원래 대상은 ‘제도로서의 교회’였지만, 동시에 ‘신앙과 삶의 방식’이 개혁의 대상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과제는 후자다. 내 신앙과 일상의 방식을 하나님의 얼굴빛과 주권 아래에서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 출발은 “하나님을 먼저 아는 일”이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비추어 보며 그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 앞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은 내 자아를 긁고 아프게 만든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지만, 그 긁힘을 통과해야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 간다. 남을 위한 헌신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드러내고, 상처와 약함을 정직히 인정하는 경험이 먼저 있어야 진짜 헌신이 가능하다.
성경은 우리 삶의 ‘토대이자 안내’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성경은 무엇을 믿고 왜 믿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파운데이션과 가이던스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한다. 오늘의 문화는 다원주의·개인주의·경쟁주의가 지배하고, 무엇보다 ‘서사의 위기’가 있다. 사건과 업데이트는 넘치는데, 의미 있는 이야기의 연속이 없다. 성경은 이야기이며, 신앙은 내 인생을 그 이야기와 연결해 한 편의 ‘의미 있는 서사’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우리의 과제는 새로움 집착이 아니라 의미에의 집중이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은 케냐에서의 체류처럼 비유할 수 있다. 그 땅에 거하되 시민권은 하나님께 있는 자로 산다. 불편함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메리토크라시(능력 공정주의)’의 압박 속에 산다. 그러나 이 질서는 출발선의 불평등을 은폐한다. 여기에 대한 신앙적 저항은 “카르페 디엠(현재를 붙잡아라)”이지만, 반드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조건으로 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영웅과 성취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사람’이었는가로 기억될 것인가. 장례식의 조사(弔辭)는 학력·경력보다 성품·관계·사랑을 말할 때 울림이 크다. 오늘의 최강 스킬은 성취 능력보다 ‘공감 능력’이다. 곁에 있는 이의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역량이 진짜 실력이다.
우리 시대의 큰 위험은 ‘셀럽 현상’과 그에 붙은 ‘지니 신앙’이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불러 도움 받는 신앙,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는 태도는 결국 ‘도덕적·치유적·자기중심적’ 신앙으로 흐른다. 하나님을 수단화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변혁하려면 먼저 자신이 변혁되어야 한다. 자기 형성 없이 타인을 고치려 들면 폭력성이 나타난다. 사회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초조도 중요하지만, 개혁은 ‘트렌드’가 아니라 ‘진리’(truth)에 뿌리 내려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시대가 달라도 근본적으로 같다. 그래서 핵심은 성품, 학업과 보금의 일상화, 공동체성이다.
자기 형성의 길은 ‘습관’과 ‘규범’이다. 생각과 확신만으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몸에 밴 삶의 방식이 바꾼다. 말씀과 기도 같은 영적 습관은 물론, 일어나고 자는 시간, 옷 입는 법, 머리 단장, 식사 방식까지 일상의 반복을 신앙과 연결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의도적 유니폼’처럼, 작은 선택을 줄이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규율은 영성에도 유익하다. 중요한 것은 할 일 목록(To-Do)이 아니라 ‘삶의 규율’(Rule of Life)이다. 기독교적 시간 사용은 타임 매니지먼트가 아니라 어텐션 매니지먼트다. 일이 많든 적든, 순간마다 하나님께 주의를 돌리는 훈련이 공허와 과부하를 이긴다. 은혜의 방편(말씀·기도)을 매일의 리듬으로 넣어라.
우리의 형성을 무너뜨리는 뿌리 죄(일곱 가지 해악)에 대한 경계와 대안적 훈련을 제시한다. 첫째, 분노다. 분노의 뿌리는 “나와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만 익숙해지지 말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하라. 타문화·타집단·장애인 시설 봉사 등은 타자 수용성을 길러 준다. 심호흡보다 효과적인 길은 의도적으로 다름 속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다.
둘째, 탐심·탐욕이다. 우리는 ‘이윤의 논리’(profit economy)에 익숙하다. 이를 이길 방법은 작은 ‘선물의 논리’(gift economy)다. 작게라도 기꺼이 나누라. 사소한 일상의 결제, 식권 나눔, 조용한 베풂은 마음을 탐심에서 끌어낸다. 주입된 갈망(남들이 가지니 나도 가져야 한다)을 분별하고 끊어내라.
셋째,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안 함’이 아니라 ‘해야 할 일엔 무기력하고, 안 해도 될 일엔 과도히 부지런한 상태’다. 스마트폰 앞의 손가락은 빠르지만 정작 중요한 과제 앞에서는 멈춘다. 해법은 규율이다. 상황과 기분과 상관없이 특정 시간에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루틴’을 몸에 새기면 무기력은 들어올 틈이 줄어든다. 군대식 규율의 효용이 여기에 있다.
넷째, 시기다. “무엇을 해야 사랑받는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경험이 쌓여야 시기가 누그러진다. 공동체는 ‘성과 칭찬’보다 ‘존재 칭찬’을 먼저 훈련해야 한다.
다섯째, 정욕이다. 욕망 자체가 악은 아니다. 문제는 인격적 대상을 비인격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을 ‘소유·소비’가 아니라 ‘존중’으로 대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안정된 관계 속에서도 상대를 도구화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여섯째, 탐식(탐욕의 한 형태)이다. 스트레스를 음식·쇼핑 등으로 즉각 달래는 습관은 감각을 둔화시킨다. 참된 감각을 회복하려면 절제와 기다림을 습관에 넣어라. 배고픔과 허기를 구분하고, 충동과 필요를 가르는 작은 멈춤이 큰 힘을 낸다.
일곱째, 교만이다. 교만은 자기 중심성이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을 넘어 ‘사랑’이다. 타자를 실질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때 자아 중심은 약화된다.
이 모든 훈련의 목적은 관계의 재구축이다. 하나님–자신–이웃–세상과의 관계가 끊기거나 흐려지면, 그 자체가 죄의 상태다. 의미 있는 연결을 복원해 삶을 ‘연속된 이야기’로 엮어야 풍요가 온다. 영생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이며, 오늘 말로 옮기면 ‘풍요로운 삶’이다. 풍요는 성취의 정상에서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 속에서 열린다.
결론적으로, 날마다의 개혁은 특별한 날의 결단보다 ‘평범한 날의 규율’로 이루어진다. 사랑·지식·총명이 균형 있게 자라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고(거울의 영성), 그리스도의 옷에 나를 맞추며(자기 수선이 아니라 자기 변형), 성경을 토대로 이야기를 회복하고(서사의 영성), Rule of Life로 주의 집중을 훈련하라(어텐션의 영성). 그러면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트렌드가 아니라 진리에 뿌리내린 삶으로, 매일의 작은 습관으로 자신과 공동체를 개혁해 갈 수 있다.